매번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일, 그 중심에 KAIST 실패연구소가 있습니다.
총 게시물 수 : 68개
2026-05-21
KAIST CAF
지난 4월 30일, KAIST 학술문화관 양승택 오디토리움에서는 KAIST 실패연구소(CAF)와 과학기술과 글로벌발전연구센터(G-CODEs)가 공동 기획한 세미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이번 세미나는 콘텐츠 플랫폼 스타트업 ‘퍼블리(PUBLY)’의 창업자 박소령 대표를 초청해, 창업 10년 동안의 선택과 실패, 그리고 그 경험을 어떻게 기록하고 남길 것인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다양한 콘텐츠와 사례 속에서 발견한 실패에 대한 여러 관점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한 박소령 대표는, 실패를 “극복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결국 지나가게 되는 과정으로 바라보며, 중요한 것은 실패 자체보다 “그 실패 이후 나에게 무엇이 남는가”라고 이야기했다. 퍼블리 창업과 운영 과정에서 겪었던 잘못된 의사결정과 주도권을 잃어갔던 순간들을 솔직하게 돌아보며, 실패를 복기하고 기록하는 과정의 의미를 공유했다. 특히 “실패는 한 판 더 하라는 뜻”이라는 한 유튜브 콘텐츠 속 문장부터, 창업과 투자, 조직 운영 과정에서 마주한 현실적인 고민들까지 폭넓게 연결하며, 실패를 바라보는 익숙한 감각을 다시 질문하게 만들었다. 이어진 대담에서는 실패연구소의 안혜정 교수와 G-CODEs의 박가영 교수가 함께 참여해, 개인의 실패 경험을 넘어 기술·콘텐츠·사회적 환경 속에서 실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특히 AI 기반 콘텐츠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 속에서 “무엇이 오래 남는 콘텐츠인가”, “사람이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하는 판단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도 함께 다루어졌다. 또한 세미나에서는 실패를 기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도 인상적으로 이어졌다. 박소령 대표는 실패 기록이 반드시 완벽한 사실 정리일 필요는 없으며, 우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과 감정을 글자로 꺼내놓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단순한 자기비난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도 강조되었다 이번 세미나는 실패를 개인의 낙인이나 단순한 결과로 바라보는 대신,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남기며 살아갈 것인지 함께 질문해보는 자리였다. 현장에서는 연구자, 학생, 창업가 등 다양한 참석자들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나누며 긴 시간 대화를 이어갔다. "시도조차 어려운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냐"는 청중의 질문에 박 대표는 담담하게 답을 전했다. "삶에서 실패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안 죽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해요. 죽지만 않으면 다음 기회는 항상 옵니다." 세미나 전체 영상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원본2026-05-21
이돈영(KAIST 생명화학공학과)
“너는 진짜 열심히 산다.” 이 말은 늘 나에게 칭찬이었고, 동시에 책임이었다. 카이스트에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학생이었다. 수업, 연구, 대외 활동, 과대표, 학생회장, 해외 봉사, 대회 준비까지.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안심시켰다. 하루의 계획표는 늘 빽빽했고, 잠시라도 멈추면 불안했던 것 같다. 성과는 자연스럽게 쌓였다. 그리고 나는 그 성과가 곧 나라는 사람을 증명해 준다고 믿었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해 보였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바쁘게 지내는 건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던지는“대단하다”는 말은 나를 더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작은 일에도 조급해지고 예민해졌다. 아침에 눈을 떠도 상쾌하지 않았고, 좋아하던 피아노 앞에도 더는 앉지 않았다. 메일함에 쌓여가는 답장하지 못한 메일들, 해야 할 일 목록이 끝없이 길어지는 걸 보면서도 이상하게도 손이 잡히지 않았다.당장 내일이 아니라, 몇 달, 몇 년 뒤까지 끊임없이 미래를 계산하고 있는 사람. 그게 그때의 나였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다들 겪는 거겠지.’, ‘지금은 중요한 때니까.’ 그렇게 나를 달래고, 때로는 다그쳤다. 지금 돌아보면 가장 위험했던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의 겨울 인턴은 그런 나에게 마지막 경고장이었다. 아침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지하철을 탔고, 실험을 하고 논문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퇴근 무렵이면 몸과 마음은 공허했고 밤늦게 집에 도착하면 머릿속은 그날의 실수와 내일의 불안으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괜찮다고 믿었다. 이 또한 과정이고, 성장이고,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짧은 휴일을 맞아 집으로 내려왔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내려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상하게도 그 따뜻한 얼굴이 더 버겁게 느껴졌다. 평소처럼 반갑고 익숙해야 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다음 학기 얘기가 나왔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숨을 삼키듯 억눌렀지만, 결국 터졌다. 엉엉, 참을 수 없이 울었다. 말 그대로 오열이었다. 항상 밝고 당당했던 딸이 이렇게 무너진 모습을 본 부모님의 얼굴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엄마의 놀라움과 슬픔이 가득 담긴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나는 실패했구나.’ 학업의 실패도, 연구의 실패도 아니다. ‘나는 나를 돌보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돌아보면, 그 실패는 하루아침에 찾아온 게 아니었다. 늘 잘하고 싶었다. 아니, ‘잘해야만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과 없는 나는 무가치하다고, 그렇게 단단하게 믿어버렸다. 그래서 감정은 늘 뒷전이었다. 불안해도, 두려워도, 힘들어도 괜찮은 척했다. “다들 버티잖아, 나만 힘든 건 아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밀어붙였고, 어느새 나는 나에게서도 고립되어 있었다. 심장은 이유 없이 쿵쾅거렸고, 지하철 안에서는 숨이 턱 막혔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고, 눈물이 나도 이유를 몰랐다. 그래도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멈추는 건 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나에게 너무 잔인했다. 그날 밤, 울다 지쳐 겨우 잠든 나는 아침이 밝자 새벽에 엄마에게서 온 한 통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 상단에는 이렇게 찍혀 있었다. “2025년2월12일 수요일 오전1시34분” 평소 밤11시면 꼭 잠자리에 들던 우리 엄마. 그 엄마가 새벽1시 반까지 깨어 있었다. 몇 번이나 지우고 쓰고를 반복하며, 무슨 말을 해야 딸이 덜 아플지 고민했겠지.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또 울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 안에서 나는 인생에서 처음 듣는 말을 마주했다. “돈영아, 그냥 쉬어도 돼.” “성과도, 속도도 중요하지 않아. 네가 웃고,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누구도 내게 쉬어도 된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친구도, 선생님도, 그리고 나 자신도. 나는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허락을 준 적이 없었다.‘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었구나.’‘한 번도 나를 돌본 적이 없었구나.’ 엄마는 말했다. “기본에 충실하며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희미한 빛이 보일 거고, 그 빛이 더디 보이면 그냥 잠시 앉아서 쉬어가면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탁 하고 뭔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엄마의 힐링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 나를 데리고 가서 맛난 음식을 잔뜩 먹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퇴근하고 돌아온 언니와 수다를 떨었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과일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였지만, 그게 얼마나 따뜻한지, 얼마나 소중한지 그제야 처음 알았다. 처음엔 여전히 불안했다.‘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남들은 달리고 있을 텐데, 나는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조금씩 풀렸다. 엄마는 매일 말했다.“성과 없어도 괜찮아. 조금 늦어도 괜찮아. 엄마는 네 편이야.”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 말은, 처음으로 내가 나를 좀 더 이해하게 만든 계기였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달라졌다. 숨이 덜 막혔다. 아침에 눈을 떠도 심장이 덜 쿵쾅거렸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조금만 해도 돼.” “쉬는 것도 해야 할 일 중 하나야.” 나는 이제 안다.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 성과는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이 실패가 내게 가르쳐준 건 아주 분명하다. ‘관계는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나는 나를 돌보는 법을, 가족이라는 가장 안전하고 단단한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완벽해야만 한다고, 당당해야만 한다고 믿으며 달려온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나를 다시 일으킨 건 성과도 아니었고, 노력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조건 없는 사랑으로 나를 바라봐준 가족. 그들의 존재와 그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힘들어도 괜찮다. 멈춰도 괜찮다. 지금의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지금도 여전히 가끔은 흔들린다. 그럴 때면 나는 핸드폰을 열어, 엄마가 새벽 1시 34분에 보내준 그 메시지를 꺼내 읽는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이 글의 마지막에 남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이미 존재만으로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다.
원본2026-05-21
Pei Jia Pok(건설 및 환경공학과)
우리가 흔히 듣는 실패 이야기는 대부분 이미 성공 이후의 이야기다. 결국에는 잘 풀렸고, 교훈도 얻었고, 모든 것이 어떻게든 정리된 뒤에 들려오는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실패는 어떨까? 실망이 아직 생생하고, 막 문이 닫혔고, 어둠이 여전히 곁에 머물러 있는 순간은 어떨까? 이 글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나는 교회 안에서 자랐다. 주일학교, 청소년부, 수련회—내 삶은 신앙과 긍정이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 속에 있었다. 나는 정해진 틀에 맞춰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죄를 고백하고, 축복을 구하는 것.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삶이 복잡해질수록 그런 기도가 항상 솔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감사할 마음이 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찬양해야 할지조차 모르겠을 때는? 하늘의 침묵이 귀를 울릴 만큼 크게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2019년, 나는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KAIST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도교수님이 은퇴를 앞두고 계셨고, 나는 새로운 연구실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정말 잘 맞을 것 같은 연구실을 발견했다. 교수님은 내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서로 이야기도 잘 통했다. 희망이 생겼다. 마치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그리고 석사 논문 디펜스를 무사히 마친 바로 그날, 불합격 소식을 들었다. 열려 있다고 믿었던 문이 눈앞에서 닫혀버린 것이다. 다행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 학기 더 머무를 수 있는 유예 기간을 얻었다. 또 다른 교수님을 찾았고, 매주 미팅도 했다. 이번에는 정말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원 마감일이 막 끝난 직후, 그 교수님은 결국 본인의 연구실과는 맞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의 거절, 또 한 번의 갑작스러운 멈춤이었다. 나는 해외 대학들에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중국, 호주, 미국의 프로그램들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대전에 삶의 터전을 일구어 놓았고, 소중한 공동체가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상황이 나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미국행을 결정했다. 하지만 원자력공학이라는 전공 배경 때문에 비자 심사가 추가 조사 대상으로 넘어갔고, 비자는 지연되었다. 결국 한 학기를 놓쳤다. 또 다시 강제로 멈춰 서야 했다. 또 한 번의 기다림, 또 한 번의 불확실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 길, 내 미래, 심지어 나 자신까지. 정말 내가 이 길을 가야 하는 걸까? 내가 쫓고 있던 연구를 정말 좋아했던 걸까? 나는 소명을 따라가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성공이라고 믿어온 어떤 모습을 좇고 있었던 걸까? 결국 나는 다시 KAIST에 지원했다. 이번에는 합격했다.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왔지만, 새로운 어려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실도 달랐고, 연구 주제도 달랐다. 뒤처진 느낌이 들었다. 벅찼다. 감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끊임없이 따라잡고만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글귀를 외우고 루틴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우울하다고?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어?” 그 말은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나를 흔들어 놓았다. 단지 정신 건강만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어려움을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 기대 자체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혼란스럽고, 화가 나고, 길을 잃은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걸까? 나는 커리어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실패하고 있는 걸까? 이건 단순히 상황의 위기가 아니었다. 정체성과 연결감의 위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이나 전통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패는 사람을 이상할 만큼 고립시킨다. 마치 나만 힘들어하는 것 같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질문을 혼자만 던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우연히, 고(故) Timothy Keller가 시편의 한 구절을 다룬 강연을 보게 되었다. 그 시편은 빛이나 해답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났다. 그 구절은 깊이 와닿았다. 그게 바로 당시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깨달았다. 오래된 지혜의 기록 속에도 혼란을 위한 자리, 슬픔을 위한 자리, 침묵과 날것의 감정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밝고 희망찬 설교가 아니었다. 냉소와 의심, 절망으로 가득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그 글은 남겨졌고, 존중받고 있었다. 그 사실은 내 안의 무언가를 바꾸어 놓았다. 종교가 있든 없든, 우리 대부분은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빨리 털고 일어나야 하고, 아픔을 충분히 살아내기도 전에 교훈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더 오래 그 고통 곁에 머물러도 되는 건 아닐까? 그 감정을 느끼고, 이름 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라도 말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내 경우에는, 그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오히려 진짜 무언가의 시작이 되었다. 괜찮은 척하는 것을 멈췄다. 모든 게 괜찮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대신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솔직함은 나를 단순한 위로보다 더 깊은 어떤 곳으로 데려갔다. 그것은 어쩌면 ‘명료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MBTI에 관심이 있다면, 나는 감정형(F) 비율이 92%다. 감정을 통해 세상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이 얼마나 크고 강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 안다. 하지만 동시에 감정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버려진 것처럼 느껴져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을 수 있다. 실패자처럼 느껴져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을 수 있다. 혼자인 것처럼 느껴져도 사실은 깊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돌아보면, 나는 여전히 왜 모든 일이 그런 방식으로 흘러갔는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왜 첫 번째 박사과정의 문이 닫혔는지, 왜 비자가 지연되었는지,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깊게 상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모른다는 사실 자체와 화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진전이었다. 가끔은 완전한 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음 한 걸음이면 충분할 때가 있다. 희망은 언제나 터널 끝의 밝은 빛 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때로 희망은 어둠 속에서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의 모습일 수도 있다. 때로는 그저 계속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당신의 여정이 아직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계속해서 문이 닫히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여전히 여기 있다면—여전히 숨 쉬고 있고, 여전히 애쓰고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희망하고 있다면—그 자체로 이미 강한 것이다. 실패는 사람을 고립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누가 끝까지 남는지를 보여준다. 누가 들어주는지,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순간에도 누가 곁의 공간을 지켜주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때로 가장 깊고 의미 있는 관계는 축하의 순간이 아니라, 실망이 지나간 뒤의 조용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만약 지금 당신이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나는 누군가가 내게 해주었으면 했던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은 망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 지독한 침묵 속에서도 말이죠. 그러니 어쩌면, 아주 어쩌면 어둠이 당신의 삶에서 마지막 문장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본2026-05-21
OOO (의과학대학원)
지금보다도 더 미숙했던 때,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애써 얻으러 했었다. 아직 내 감정조차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어찌할 줄 몰랐고, 상대를 살피며 나를 지워갔다. 그땐 사람의 마음에도 실패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이따금씩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힘들어지는 시기가 있다. 내가 힘들었던 시기에 나타나 나에게 새로운 감정과 재미를 주고 힘듦을 잊게 만들어준 그 사람을 나는 쉬이 놓지 못했다. 처음에는 힘든 시간을 함께해줘서 마음이 갔다. 나를 재밌게 해주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며 나에게 눈을 맞췄고, 함께 걷는 길에서는 걸음을 맞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행동들보다 그 사람 자체가 좋아졌다. 나와 같이 있고 싶다고 수줍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불안했고, 한편으로는 그와 그렇게 가까워지는 게 좋았다.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우리 사이를 보며, 당연히 우리의 결말은 긍정적일 거라고 예상했다. 서로 비슷한 점을 하나씩 늘어놓으며 이제야 만난 우리가 같은 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끊기지 않는 대화가 재밌었고, 서로의 일상을 간질간질한 말로 나누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잠에서 깨어 나갈 채비를 할 때도,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동기들과 캠퍼스를 거닐 때도, 나는 그와 나눌 재미난 에피소드를 찾으려 노력했다. 내 일상은 그와 나눌 이야기로 채워져 갔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상대를 위한 배려와 희생이 나를 지키고 상대도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일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그에게 되물었을 때, 그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보니 사랑인 건가 싶다고 했다. 이런 대화거리가 사라질 때쯤, 우리의 관계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같은 과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둘이 함께 걸어가던 육교 위에서 그는 술기운을 빌려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물론 너무 좋았다. 그러나 맨정신에 다시 확인받고 싶었던 나는 “그런 말은 맨정신에 해줘.”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소위 말하는 썸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 켠의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답답했던 나는 우리 사이를 결론 짓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나와 사귀고 싶진 않지만 계속 이런 사이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참 이기적인 말이었다. 이럴 거면 시작하지도 말지. 아니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건가? 나는 이 애매한 관계를 끝내던가 사귀던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을 생각했기에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사귄 적도 없는데 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울며 말하는 나에게 그는 “그럼 안 헤어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이미 내 마음에 자리잡은 그를 다시 내보내는 게 너무 싫었다. 사귀지 않을 거면 끊어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애매한 사이로나마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다 이성이 앞서갔을 땐 그를 밀어내려고 그만하자 말했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감정이 더 커져 원래대로 돌아오곤 했다. 어찌 보면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우리는 이 불안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익숙함과 좋아하는 마음은 커지는데,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정의 내릴 수 없고, 그는 점점 이 관계에 흥미를 잃어가는 게 느껴졌다. 가볍게 생각하자, 기대하지 말자, 하면서도 나와 같은 크기의 마음을 자꾸만 그에게 기대했고, 그게 아니면 혼자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나를 점점 작게 만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너무 따뜻하고, 어느 날은 너무 차가운 그의 말과 행동은 더운 물을 붓고 거기에 다시 찬 얼음을 쏟아붓듯이 미지근함을 유지했다. 그는“나는 너를 제일 걱정하고 신경 써.”라며 더운 물을 부었다가, “너랑 이러는 거 이제 재미없어!”라며 찬 얼음을 끼얹었다. 그의 온도에 맞추느라 내 온도는 계속 오락가락했다. 그럼에도 그의 미지근한 온도가 나에게 닿으면 차가우려 했던 내 마음이 어느새 뜨거워졌다. 그 온도가 올라갈수록 처음엔 녹아내리던 내 마음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같았고,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내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했다. 그가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며 다가오면 그날의 내 기분은 맑았고, 그가 나에게 차갑게 대하며 멀어지면 그날의 내 기분은 흐렸다. 이런 내 모습이 정말 싫었지만, 내 마음은 또 그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내 하루는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나는 항상 그를 생각했다. 그렇게나마 그와 연결된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또 다시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서로가 일상에 너무 스며들어 있었다. 서로가 없는 일상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관성처럼 서로를 찾았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그냥 만나서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냈는지 얘기하며 맥주 한잔하는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누구 하나가 정신이 들면, 이제는 진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로 “그만하자.”, “아니 다시 잘 지내보자.”는 말을 던지고 받으며 또 시간이 흘러갔다. 언젠가 이 마음이 닳고 닳아서 내가 그를 놓을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이때쯤 나는 ‘계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에게 그는 내가 갖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나는 남 주긴 아깝지만, 내가 갖기는 싫은 계륵이었던 것 같다. 이 관계는 결국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부족했고, 우정이라기엔 너무 과했다. 그래서 이 관계는 실패였다. 그를 통해 내 감정의 밑바닥도 보았고, 내 자존심의 끝도 보았다. 내가 그의 마음 모두를 얻으려 할수록 그는 나와 멀어지고 싶어 했다. 이에 지쳐 나도 이 악물고 그를 멀리 하면 그는 어느새 다시 내게 다가왔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한 번 속는 척하며 그에게 돌아갔다. 그 정신없는 도파민에 파묻힌 채 지냈던 시간을 모두 늘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동안 나는 그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빠는 이제 나 싫어?”라고 물었다. 그는 “싫은 거 60%, 좋은 거 40%야.”라고 답했다. 싫은 마음이 60%라는 말이 내 마음을 찔렀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마음이 40%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싫은 마음이 60%나 되는데 왜 맨날 같이 있어?”라고 물으니, “그게 내 일상이 된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그의 일상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이런 말을 듣고도 나를 잃는 것보다 그와 멀어지는 게 더 싫었다.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했다. 그가 어떤 말을 싫어할지, 어떤 행동을 싫어할지에 대한 질문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점점 작아지는 나를 보면서도, 나는 그걸 당연시했다. 다른 곳을 향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느 날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입밖으로 나올 것도 같았지만, 꾹 삼키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별 것 아닌 척했다. 혼자 이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안에는 답답함과 상처가 늘어가고 원래의 해맑던 모습을 잃어 갔다. 그의 마음을 넘겨짚을수록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에게 더 집착했다. 그는 그걸 못 견뎠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사랑의 실패라기 보다는 나를 지키는 것에 대한 실패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나를 잃고서야 이 관계는 실패였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그 긴 시간 내내 불안하고 상처받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함께 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편안하진 않았지만 편했고, 하루 끝에 함께 술 한잔 나누며 근심을 털어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꽤나 큰 안정이었다. 서로 아껴주지 못하고 날이 서있던 말과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버텨왔다. 나는 그 앞에서 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를 잃는 게 무서웠던 걸까, 그를 사랑했던 내 모습을 잃는 게 무서웠던 걸까. 나를 버리면서까지 지키려던 관계를 상대가 먼저 놓았을 때, 짧지 않은 시간이 나에게 이별 아닌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나의 일상이었다. 그의 집 앞에 찾아가 있는 힘껏 붙잡아도 봤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단호했다. 나는 그 실패를 꽤 오랫동안 부정하고 싶었다. 보통의 것과는 다른 그런 관계를 믿은 내 순진함이 미웠다. 그를 좋아했던 마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도 나랑 비슷한 크기의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그가 나에게 밝게 웃어주고 나도 그 앞에서 해맑기만 했던 모습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후회. 그 중에서도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장 컸다. 이런 마음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지만 그는 나와의 대화 자체를 피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카톡을 보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너무 과해.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야?”라고 물었다. 그의 진심 같았던 표현을 굳게 믿고 보여준 내 진심이 부정당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내 일상은 그였는데, 갑자기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는 게 싫었다. 그런데 그는 나와 멀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끝에 지친 내가 그를 마침내 놓았을 때, 그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그와 함께한 시간동안 나를 아껴주지 못했다는 자각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실패해도 나 자신까지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그가 나에게 오기 전에 나는 어떻게 살았었지? 이전의 내 일상이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내가 누구인지 정의 내려야 했다. 어리숙했던 그 시기에 모든 걸 의지했고, 하루 끝에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버텼기에 그를 놓는 건 이제 내가 진짜로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서로 좋아서 시작된 관계였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너무 진심을 줘 버렸나 하는 자책도 해봤다. 처음엔 자기가 좋다고 시작했으면서 내 마음이 더 커져 버리니 멀어진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이때 나는 무작정 바쁘게 지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채워가며 조금씩 다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 관계의 실패를 통해 혼자인 나도 온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랑 없이도 나는 나였고, 사랑 안에서도 그랬어야 했다. 온전한 사랑은 오히려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 사랑에서는 나를 잃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내가 막상 체념하니, 그도 약간은 아쉬웠나 보다. 그러나 그건 나라서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갔다는 공허함 때문이었을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반가운 말에 속지 않기로 했다. 그가 영영 떠나버리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이어질 날이 오겠지. 이번 타이밍은 서로에게 영 아니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 그가 너무 빨리 들어왔다. 너무 좋아했지만 서툴렀기에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들은 후회로 남았다. 지금 그를 만났다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은 더 성숙한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그와의 그 애매한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서로의 밑바닥을 애써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를 떠난 것인지 나를 놓아준 것인지, 내가 그를 놓아준 것인지 그를 떠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완전히 떠나며 힘들어하는 나에게, 시간이 지나면 다 무뎌질 거라고 말했었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말했다.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의 모서리는 조금씩 닳아 무뎌지고, 어느새 그 자리를 웃음이 채우고 있었다. 그와의 기억은 그대로였지만, 그와의 추억은 미화된 채로 그 시절에 남아있었다. 떠올리면 가슴 아팠던 시절을 지나, 떠올려도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날이 왔다. 가끔은 그의 옆에서 밝게 웃던 내 모습이 그립기도 하지만, 나를 무엇보다도 힘들게 했고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던 때로 역주행하지 않기로 했다. ‘멀어진 우리 거리만큼 내 삶과 더 가까워져서’라는 노래 가사가 맴돌았다. 그 사랑의 실패는 나를 무너뜨렸지만, 그 위에 다시 나를 일으켰다. 이 시기를 보내는 동안 나는 또 한 걸음 성장했다. 관계의 실패가 언제나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다. 적어도 사랑을 다 쏟아부은 그 시기의 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고요해졌을 무렵, 새로운 사람이 다가왔다. 그 사람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조용히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또 상처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나는 사랑을 핑계로 나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 나는 서로의 온도를 가늠하고, 온도가 맞는 사람과 찬찬히 어우러지길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치를 보며 내 마음을 검열하지 않아도 됐다. 내 속도를 존중해주는 사람과 사소한 일상에도 마음껏 웃으며 나를 지킨 채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사랑 역시 조심스럽게 끝을 맺었지만, 내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사람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지 나는 나 자신을 지켜내어 온전한 사랑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원본
2026-03-27
KAIST CAF
KAIST가 세 번째 ‘실패포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2024년부터 시작된 KAIST 실패포상은 연구, 교육, 창업, 행정 각 부문에서 결과가 아닌 도전의 과정과 실패로부터의 학습을 통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 구성원에게 수여된다. 수상자에게는 총장 명의의 표창장과 함께 상금이 수여된다. 올해 실패대상의 영예는 창업부문의 학부생 창업팀 ‘당고(Dango)’팀이 차지했다. 당고팀은 단기간의 성과보다 현장의 실제 문제를 이해하는데 집중하며 수차례의 실패와 거절을 학습의 자원으로 전환해 온 사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고팀은 초기 창업과정에서 아이디어 미성숙과 문제 정의의 한계로 예선 탈락을 경험했으며, 이후에도 사업방향 수정, 핵심 공동창업자의 이탈, 반복되는 시장의 부정적 평가 등 연속적인 실패를 겪었다. 특히 핵심인재 이탈 후 팀의 존속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으나, 대표 송원태를 중심으로 팀 빌딩을 재구성해 재도전을 선택했다. 팀 리빌딩 이후, 당고 팀은 외식 자영업 마케팅 개선을 위한 ‘쿠폰앱’, ‘단골관리앱’ 등을 구상했으나 다시 한번 수많은 부정적 평가에 부딪힌다. 단순한 외부 반대가 아니라 실패 가능성이 높은 가설에 대한 신호로 받아들인 당고팀은 실패의 원인을 현장에서 찾기로 했다. 수십 명의 외식 점주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끝에 기존 가설을 과감히 폐기하고, 로컬 상권에서 점주와 단골을 실제로 연결하는 구조로 비즈니스 모델을 전면 수정한다. 그 결과 유료 MVP고객을 확보하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이러한 학습의 축적은 KAIST App 창업 프로그램 금상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실패연구소는 “당고 팀은 실패를 미화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실패를 관리하고 학습하는 대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실패포상의 취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실패를 통해 더 단단한 실행 역량을 축적해 나간 과정 자체가 대상 선정의 핵심 이유”라고 밝혔다. 한편 연구부문 실패상은 K3I-KAIST 아시아지식재산공동체 연구센터의 정경란 연수연구원에게 돌아갔다. 정 연구원은 30~40대에 이르는 경력 단절과 반복된 진학 거절, 박사과정 중 겪은 심각한 재정적 실패 속에서도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이어왔다. 그는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한 선택보다, 실패를 감내하며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은 실패로부터 어떻게 학습하는가(organizational learning from failure)’라는 연구 주제로 확장해 왔다. 실패 이후의 성공을 강조하기보다, 실패를 마주하는 태도가 개인과 연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교육부문 실패상은 기계공학과 김성용 부교수가 수상했다. 김 교수는 KAIST 내에서 상대적으로 희소한 지구과학·해양학 분야 교육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낮은 인지도와 공감대 부족이라는 한계에 직면했다. 그는 기존 교과의 단순한 확장이 아닌 새로운 교과목 개발, 한글·영문 교재 출간, KOOC 온라인 강의 개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 자산을 축적해 왔다. 특히 학생들이 어렵게 느끼는 전공 내용을 대중적 언어와 비유로 풀어내기 위한 반복적인 시도는, 한계에 머머무르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확장한 사례로 평가되었다. 행정부문 실패상은 정보통신팀 민경진 학연행정원이 수상했다. 민 행정원은 반복되는 민원과 행정 마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 해결책 도입을 시도했으나, 예산 및 의사결정 구조로 인해 여러 차례 무산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를 계기로 문제의 본질이 기술적 한계나 시스템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보와 루머에 기반한 민원인의 비효율적 패턴에 있음을 피악한다. 이에 민원 패턴 분석과 정보 정비, 업무 원칙 재정립을 통해 기술적 해결책 대신 행정 프로세스를 단계적으로 개선했다. 그 결과, 대표전화 대기 시간 단축과 민원 구조의 안정화라는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KAIST 실패포상은 실패를 단순히 위로하거나 미화하는 상이 아니다. 도전의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를 학습 가능한 교훈으로 전환하고, 그 교훈이 다른 구성원에게도 의미있는 자산이 될 수 있도록 확산하는 데 목적이 있다. 2026년 실패포상 수상자들의 이야기는 실패가 좌절의 종착지가 아니라, 더 나은 판단과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KAIST는 앞으로도 실패를 숨기지 않고 공유하며, 실패로부터 배우는 문화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2026 KAIST 실패포상 수상자 명단 실패대상 창업부문 : 당고(Dango) 팀 전산학부 송원태, 황혜원, 허재영 산업디자인학과 박주언, 신은지 전기및전자공학부 황현우, 지동석 실패상 연구부문 : 정경란 (K3I-KAIST 아시아지식재산공동체 연구센터 연수연구원) 교육부문 : 김성용 (기계공학과 부교수) 행정부문 : 민경진 (정보통신팀 학연행정원)
원본
2026-03-27
Saimum Omar Sayeed(물리학과)
들어가며 KAIST라는 경쟁적 생태계에서 성공은 측정 가능하다. 학점(GPA), 인턴십, 논문, 장학금. 겉으로 보기엔 나는 잘 해내고 있었다. KAIST에 입학한 첫 순간부터 나는 학업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데 집중했다. 가능한 한 일찍 연구에 참여하고, 미래를 위한 탄탄한 기반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1학년부터 높은 학점을 유지했고, 3학기부터는 심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학부연구참여(URP) 프로그램에 참가해 우수상을 받았고, 6학기에는 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구실 중 하나인 프랑스 Ecole Polytechnique의 LLR에서 6개월 연구 인턴십까지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학업적 능력’의 배지들이다. 그런데도 이 성취들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공백이 있었다. 잠 못 자는 밤과 거른 식사, 말없이 지나간 학기들 사이 어딘가에 빠진 조각,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있었다. 나는 과제나 연구가 아니라 ‘관계’에서 실패했다. 동아리에 들어가지 않았고, 거의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수면은 들쭉날쭉했고, 카페인과 관성으로 버텼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학업과 커리어 기준으로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실패하고 있었다. 진짜 관계를 쌓는 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데,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돌보는 데 실패했다. 이 글은 내가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공간’을 한 번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에서 실패했던 이야기다. 그리고 한 번의 교환학생 경험과 예상치 못한 배움들을 통해,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게 되었다. 더 행복해졌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제대로’ 성공하는 방식 말이다. 그라인드 나는 열심히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한다. 노력은 많은 것을 주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고, 기회를 데려왔고, 방향감도 선명해졌다. 다만 내 실행 방식은 제대로, 적어도 건강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초기 몇 학기 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 기숙사 방, 도서관에서 보냈다. 동아리 박람회에 가지 않았고, 팀 프로젝트 밖에서 동기들과 어울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효율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나에게 관계는 효율적이지 않아 보였다. 수면은 불규칙했고 카페인과 추진력으로 살았다. 시험 기간엔 나흘 연속으로 잠을 거의 자지 않은 적도 있다. 카페인을 하루 1,000mg 가까이 섭취하던 때도 있었다. 3학기 이후부터 나는 마치 프로 운동선수가 훈련하듯 학업적 탁월함에 몰입했다. 일찍 연구 그룹에 들어갔고, 전공심화 강의를 들었고, 수강 계획을 정밀하게 짰다. A+ 하나하나가 내가 구축한 시스템을 증명하는 데이터처럼 느껴졌다. 일정표는 색깔로 구분되어 최적화되어 있었다. 잠은 소모품이었고, 식사는 미뤄졌고, 우정은… 선택사항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동아리에 들어갈 때 나는 연구실에 있었다. 그들이 주말 여행을 가거나 밤 산책을 할 때 나는 책상 앞에 있었다. 그들이 친구를 만들 때 나는 이력서를 쌓았다. 돌이켜보면, 강의실에서 내 옆에 앉았던 사람들의 이름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이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연결될 만큼 멈춘 적이 없어서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합리화했다. 관계는 ‘방해’라고, 나머지는 ‘사치’라고.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성적이 증명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갈아 넣었다. 그 당시 나는 이렇게 믿었다. 친구를 사귀면 속도가 느려지고, 관계를 맺으면 성장에 제동이 걸린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한 시간은 문제 풀이, 코딩, 논문 읽기 한 시간을 빼앗는다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라냈다. 내 일정은 가득 찼지만, 내 삶은 채워지지 않았다. 처음엔 잘 모르고 지나갔다. 좋은 성적과 연구 진전이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짐이 찾아왔다. 연결감 없이 ‘절차’를 수행하는 느낌.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냥 늘 피곤했다. 몇 년 동안 하루 3~4시간 수면으로 살면 그 이상을 기대하긴 어렵다. 인턴십이 준 경고 6학기 때 나는 6개월 인턴십을 떠났다. 대단한 기회였지만, 동시에 외로운 기회였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는 관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을 KAIST 생활의 ‘연장선’으로 대했다. 열심히 일하고, 결과를 내고, 계속 밀어붙였다. 학업 여정의 ‘왕관’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경험은 거울이 되었다. 일은 자극적이었고 목표와도 잘 맞았다. 그런데 KAIST 기숙사 생활에서조차 있던 얕은 사회적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업무적인 대화를 제외하면 며칠 동안 누구와도 개인적인 말을 하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함께한 것은 공부, 코드, 커피, 할 일 목록뿐이었다. 그러다 무언가가 바뀌었다. 최소한의 상호작용마저 사라지자 고립감이 선명해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오늘 나는 개인적인 대화를 한 번도 하지 않았구나”를 깨닫는 순간들이 반복됐다. 침묵이 너무 컸고, 비어 있는 저녁 시간이 끝없이 늘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대체 이걸 왜 하고 있지?”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쫓던 성공은 더 이상 성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기계적이었다. 성취는 하고 있었지만 성장하고 있지 않았다. 살아 있지 않았다. 바뀌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아직 몰랐다. 교환학생: 전환점 진짜 변화는 7학기, 스웨덴 스톡홀름의 KTH 왕립공과대학교(KTH Royal Institute of Technology)로 교환학생을 가면서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면, ‘인생이 바뀔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원 지원과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위한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또 한번 나를 갈아넣을 학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선 루틴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가 될 줄은 몰랐다. 그곳에서 나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도 열심히 살지만, 일 밖의 삶을 똑같이 소중히 여겼다. 주말엔 하이킹을 갔고, 수업 뒤엔 클라이밍을 했고, 가까운 강에서 카약을 탔다. 나는 처음엔 머뭇거리다가 점점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요리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고, 음악과 철학 이야기를 하며 늦게까지 떠들었다. 여행을 했고, 춤을 췄고, 산과 강을 사랑하게 됐다. 야외를 즐기고, 친구를 만들고,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학업과 연구를 계속 해낼 수 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스트레스 받고 수면 부족인 상태보다 뇌가 더 잘 돌아갔다. 중요한 건 활동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존재하는 법’을 배운 것이었다. 나는 하루를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나”로 재지 않고, “어떻게 느꼈나, 무엇을 배웠나, 누구와 연결되었나”로 재기 시작했다. 그 학기, 나는 ‘지속 가능한 탁월함(sustainable excellence)’을 발견했다. 성공은 투입 시간의 총량이 아니라, 내가 가져오는 주의의 질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의는 관계, 휴식, 기쁨으로 내가 영양을 받을 때만 가능했다. 처음으로 나는 “잘하고 있다”를 넘어, “잘 지내고 있다”를 경험했다. KAIST로 돌아와서: 다른 방식으로 살기 KAIST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충분히 잠을 자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진짜 우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 삶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누군가와 장기적인 관계도 시작했다. 특히 또렷한 순간이 하나 있다. 내 여자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너는 잠을 제대로 자야 해.” 사실 그 말을 들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룸메이트도, 교수님도, 의사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들었다. 교환학생 때 균형 잡힌 삶이 내 수행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미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험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생산성이 떨어지긴커녕 치솟았다. 집중이 더 잘 됐고, 문제를 더 빠르게 풀었고, 불안이 줄었다. 내가 ‘낭비’라고 믿던 시간이 오히려 힘의 원천이 됐다. 더 잘 집중했고, 더 빨리 일했고, 쉽게 번아웃되지 않았다. 잠이 낭비라는 믿음은 완전히 틀렸다. 성적에서도 변화가 보였다. 마지막 학기들은 KAIST 전체 기간 중 성적이 가장 좋았고, 그중 마지막 학기는 A0 한 과목을 제외하면 전부 A+로 내 인생 최고의 학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연료가 다 떨어진 상태’로 버틴 게 아니었다. 에너지가 있었고, 평온이 있었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내가 배운 것 돌이켜보면 내 실패는 악의나 오만 때문이 아니었다. 성공과 관계가 제로섬 게임이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생적이다. 관계는 방해가 아니라 증폭기다. 예전의 나는 “덜 해내는 것”, “쉬는 것”, “관계에 시간을 쓰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진짜 성공의 열쇠였다. 나는 노력하지 않아서 실패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몰라서 실패했다. 관계는 인생의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다. 오히려 핵심이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중심이며, 장기적으로 더 잘 성공하게 만드는 기반이다. 웃고 이야기하고 함께 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모든 일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나는 생산성이란 나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생산성은 에너지가 ‘정기적으로 다시 채워지는’ 삶을 설계하는 것이다. 기쁨으로, 사람으로, 목적의식으로. 중요한 건 주의의 질, 감정적 안정, 그리고 각 과업에 가져오는 에너지였다. 예전엔 성공과 사적인 삶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나를 돌보고 타인과 연결되기 시작한 뒤 나는 더 회복력 있어졌고, 더 창의적이 되었고, 더 동기화됐다. 무엇보다, 이전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성공을 ‘측정 가능한 결과’만으로 평가하지 않게 된 것이다. 대신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친절한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 나는 지식뿐 아니라 지혜에서도 성장하고 있는가? 마치며 나는 KAIST 초기 몇 년 동안의 노력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구와 학점만큼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건 아쉽다. 예전엔 시험에서 떨어지는 게 두려웠다. 이제 나는, 진짜 실패는 ‘살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나는 여전히 학업적 성공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 정의했다. 나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라면, 완벽한 GPA는 큰 의미가 없다. 내가 배운 탁월함은 ‘인간적일 때만’ 진짜다. 이제 나는 잘 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내 주변의 세계를 즐긴다. 물론 여전히 내 일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한다. 다만 그 대가로 다른 모든 것을 지불하지 않는다. 삶은 더 균형 잡혔고, 그 차이가 모든 것을 바꿨다. 관계가 선택사항이라고 믿던 시절, 나는 관계에서 실패했다. 이제 나는 관계가 필수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더 좋은 학생일 뿐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 성적표로는 담아낼 수 없는 성공, 하지만 나는 평생 그 성공을 품고 갈 것이다.
원본
2026-03-27
○○○ (전기및전자공학부)
코드를 쓰는 일은 이야기를 쓰는 것과 닮아 있다. 같은 문제를 보고 누군가는 우아하게 재귀를 감고, 누군가는 단단한 반복문으로 묵묵히 전진한다. 며칠 밤을 지새운 여든 줄의 서사는 어느 금요일 아침 세 줄의 명료한 독백으로 바뀌기도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 하나의 무대에 올라 막을 여는 것처럼, 저마다의 문법과 리듬을 담은 코드들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엮여 세상에 배포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무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더 적은 리소스로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했고, 속도와 효율만이 환영받는 세상에서 ‘창의’라는 말은 서툰 변명이 되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떠밀려 좋은 평가를 위해 나를 면접의 잣대에 끼워 맞췄다. 인공지능의 무정한 계산이 더해진 정량적 기준은 차갑게 숨을 조여 왔고,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만 증명되는 가능성에 목매어 냉혹한 판단 앞에서 버티는 법을 배웠다. 컴퓨터를 향한 애정은 남아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가슴 한 켠을 자욱하게 뒤덮었고, 연필 끝이 닿기도 전에 이미 닫혀버린 괄호처럼 마음 속에서 피어 오르던 이야기는 화면 위의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흐려졌다. 한때 내게 소중했던 일은 어느새 애정과 동떨어진 것이 되었고, 화면 귀퉁이에 남아 있던 오래된 주석처럼 그 감정도 말없이 지워졌다. 나는 전산학을 여러 번 시작했고, 또 여러 번 그만두었다. 두 개로 갈라진 내 한쪽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아갔고 다른 쪽은 그 손을 쳐내며 그만두라고 속삭였다. 하루에도 수없이 충돌하는 그 두 목소리에 하루는 설레는 마음으로 화면을 열었지만 또 어떤 날은 손끝이 키보드에 닿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에서 반짝이던 별들은 별자리로 연결되기 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밤하늘을 지우듯 컴퓨터를 닫았다. 지난 12월에 한 네트워크 보안 서비스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에서 인턴십 기회를 얻었다. 겨우 2학년을 마친 나에게 ‘네트워크’라는 단어는 낯설고 어색했다. 기술 블로그에서 주워 온 낯선 용어들을 서툴게 입에 올리며 겉으로는 자신 있어 보이려 애썼지만, 무거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다. 친구들이 부럽다며 웃어줄 때조차 불안과 긴장에 휘둘렸고, 따뜻한 기숙사 방과 익숙한 일상을 뒤로한 채 어렵게 맺은 친구들과 이제 막 정들기 시작한 학교를 잠시 접어두고 낯선 공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막막했다. 가을학기가 막 끝난 그 다음 주, 나는 ‘플랫폼 개발팀 인턴’이라는 낯선 타이틀을 달았다. 그 이름은 내 이름 옆에서 마치 균형을 잃은 무게추처럼 한참을 흔들렸다. 처음 출근한 회사의 모니터 앞에서 설렘보다는 의심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내가 쓴 코드가, 내가 내린 선택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스타트업이었기에 인턴 신분인 내게도 상상 이상의 권한이 주어졌고, 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무게는 내가 애써 붙들던 자신감마저 산산조각 냈다. 첫 2주간은 정해진 온보딩 과정을 따랐다. 환경 세팅 하나도 쉽지 않았고, 작은 오타 하나에 콘솔창은 붉은 비명을 질렸다. 정교하게 짜인 기존의 코드를 읽는 일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별자리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따라 그리는 일이었다. 그 별들, 즉 함수와 클래스들은 각자의 의미를 품고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읽은 물고기자리가 누군가에겐 사자였으며 누군가에겐 전갈이었을 것이다. 이 회사의 이야기를, 그 무대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렇게 나는 엉뚱하고 어긋나더라도 나의 언어로 별들을 연결했다. 2주 차 개발팀 미팅에서 나는 회사 코드의 인프라 구조를 설명해야 했다. 말은 입을 떠났고, 심장은 그 뒤를 헐떡이며 따라갔다. 누군가의 질문과 이어진 설명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조용히 무너졌다. 매일 코드를 읽고 로그를 살피며 작은 수정을 거듭했지만, 처음 마주한 네트워크의 세게는 너무나 넓고 차가웠다. 나는 이 팀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휘청거리며 나 없이도 잘 돌아갈 팀을 보며 존재감 없는 자리를 지켰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모두 떠난 무대에 혼자 남아, 텅 빈 객석을 향해 혼잣말을 읊조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좋아서 그만두지 않았다. 말없이 해야 하는 일들, 실수해서는 안 되는 순간들, 때로는 바보 같았던 질문에도 그들은 친절했다. 매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듣던 인공지능, 주식, 게임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따뜻한 식사와 같이 마음에 남았다. 따뜻한 사람들 아래 나는 조금씩 배우고 있었고, 그래서 견디고 싶었다. 똑같은 문제를 또 마주할 생각에 몸서리쳤던 출근길을 지나, 실수와 추위가 겹쳐 더 쓰라리었던 겨울을 지나, 나는 마침내 처음 맡은 임무를 마무리했다. 작지만 단단한 성취감이 두려움을 녹였고 그 속에 깃든 나의 성장을 조금은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수록 마음이 편안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 일이 재미있어졌다. 내가 만든 기능이 실제 서비스에 반영되고, 로그에 내 코드가 남고, 동료의 코드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뿌듯했다. 내가 맡았던 부분에 대해 누군가 묻고, 결정을 부탁하는 말에 대답하며, 처음에는 무겁게만 느꼈던 책임감이 나를 짓누르기보단 생각을 다지게 했다. 실수를 두려워하기보단 더 배워서 개선하고 기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누군가의 리뷰가 부담스럽기보다는 감사했고, 그 리뷰 속에서 나는 다시 성장했다. 두려움과 애정이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은 두렵지 않다. 실패의 기억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쓰고 싶다. 인턴십은 나의 관심과 재미에 다시 불을 붙여주었다. 불안하던 문장 끝에 쉼표 하나를 찍어주었고, 이제 나는 그 쉼표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간다. 내가 만든 이야기의 다음 장이 궁금해졌다. 9주간의 학교 연계 인턴십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한 학기를 연장하고 싶다고 부탁드렸고, 뜻밖에도 쉽게 승낙을 받았다. 그건 더 배우고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고, 더 쓰고 싶은 이야기의 한 장이었다. 어느 날, 회의실 너머로 영어 면접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몇 주 뒤 점심시간, 나는 처음으로 H를 만났다. 비즈니스팀 인턴으로 새로 합류한 H는 내가 익숙했던 개발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개발팀과 보냈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한 발짝 뒤에 서 있었다. 성과는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개발 지식과 처음 겪는 회사의 질서에 주눅들었고, 실수할까 봐, 미숙함이 들킬까 봐,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말을 줄이고 격식을 입었다. 그렇게 배움의 폭은 넓었지만, 서로에게 마음이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H는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고, 내게도 그랬다. 나는 아직 조심스러웠다. 회사는 여전히 나에게 실수하면 안 되는 곳, 나 자신으로는 머물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H 앞에서도 나는 가면을 벗지 못한 채, 예의 바르게, 공손하게,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그러다 5월 말, 어느 평범한 금요일 밤이었다. 별 의미 없이 흘러갈 것 같던 대화가 어느새 방향을 틀었고, 무겁고, 가볍고, 짧지 않은 이야기들이 밤새 이어졌다. 나는 처음으로 H와 이야기했다. 그날 밤, 떠오르는 햇살과 함께 내가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벽은 아주 조금 느슨히 녹았고, 그 틈으로, 처음으로 나를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느낌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4개월간의 회사 인턴십이 끝나갈 무렵, 나는 다시 인턴십 연장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더 머물고 싶어서였다. 더 도전하고 싶었고, 더 배우고 싶었고, 이대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기에는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주 후, 밤11시가 넘은 시각, “이번 연장 요청은 어렵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라는 문장이 도착했다. 그 문장은 마치 이별 통보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몇 번이고 그 메일을 다시 읽었다. 내가 놓친 게 있었나, 어디서 실수했을까. 나는 무례하지 않으려 애썼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고, 최선을 다했고, 지치더라도 버텼는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이 이렇게 결과가 찾아왔다. 그 자리가 단 하나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길에서 조용히 밀려났다. 회사라는 공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빠르고 차가웠다. 이제야 조금 익숙하다는 감정은 금세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게 두려웠고, 나를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피로했다. 실패는 결과보다도 오래 남는 공허함을 남긴다. 마치 불 꺼진 극장의 텅 빈 객석에 홀로 앉아 마지막 장면을 붙잡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도 듣지 않지만 계속해서 대사를 되뇌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극장에 누군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커튼콜이 끝나고도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 가면 아래의 나를 본 단 한 사람이었던 H. 비즈니스 팀이었기에 개발자의 입장에서 회사 서비스를 설명해 달라며, 그는 어느 날 새벽에 별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 “회사 프로그램 구조, 혹시 설명해 줄 수 있어?” 그 질문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때는 이해하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였다. 온보딩 두 번째 주에 문서와 콘솔, 리포지토리 사이를 헤매다 결국 침묵했던, 그리고 계속 침묵하게 만들었던 그 구조. 그런데 그날 나는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반년 동안 안에서 길을 찾았고, 그 여정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그는 내 설명이 여전히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가 무너진 마음 속 폐허에 조용히 내려앉아 작고 단단한 기둥이 되었다. 스스로를 의심하던 시간들, 매 줄마다 달린 리뷰에 울고 웃던 날들이 헛되이 흩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남긴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여전히 의미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술적인 이야기, 언젠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때로는 아무 말도 아닌 말들 속에서 그는 여전히 귀 기울였고, 나는 가면 아래 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저 ‘회사 사람’이었던 그가, 어느새 내 말의 결을 따라 이해해 주는 사람이 되었고, 그 믿음이, 내가 나를 다시 믿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실패를 두고 묻는다. “그래서 거기서 뭘 배웠어?” 마치 그 질문이 정답이라도 되는 듯, 어떤 교훈을 끌어내야만 실패가 의미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떤 실패는 배움보다 더 큰 것을 남긴다. 눈에 띄지 않고, 소리 없이 머무르지만, 가장 오래 가는 것, 관계. 나는 무너졌다. 하지만 그 무너진 조각들을 함께 바라봐 준 사람이 있었고, 다시 쌓아갈 수 있다고 믿게 해 준 사람이 있었기에 그 자리는 폐허가 아닌 다음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이 인턴십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커리어나 성취가 아니다. 직함 없이도 이어진 이해와 존중, 실패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인간적인 연결. 문 너머를 함께 바라봐 준 팀원, 그리고 무너진 자리에서 보물처럼 남아 있던 가능성과, 함께 다시 세워갈 미래를 믿어준 사람, H. 그토록 망설였던 컴퓨터와의 이야기를 이제 다시 펼친다. 두려움 속에서도 인턴십을 시작했고, 부끄러움과 자신감의 잔해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실패에 손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시 펜을 잡는다. 한때는 완벽함의 강박 아래 누군가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며 도망치듯 달렸고, 결국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다. 실패도, 관계도, 나 자신을 모두 담은, 나의 마음으로, 나의 언어로 쓰는 이야기이다. 나는 완벽을 좇는 개발자가 아니라, 이해와 연결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제는 안다. 어떤 문이 닫히는 순간, 꼭 다음 문을 서둘러 열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 문 앞에 함께 서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 기다림조차 충분히 의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존재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내가 다시 나를 믿어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떤 성공보다 깊고 단단하게 나를 지탱해 준다. 닫혀버린 괄호 끝에서,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원본
2026-03-05
Singh Aanya (항공우주학과)
2025년의 봄은 성취감으로 시작됐다. 몇 달 동안 공을 들여 준비해 온, 저명한 글로벌 기업가정신 프로그램(Global Entrepreneurship Summer School, GESS 2025)에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팀은 프로그램의 두 번째 모듈을 위해 실리콘밸리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업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일 것이다. 기업가정신에 대한 나의 열정을 가득 안고 항공우주 학과 경영학이라는 나의 배경에서 이제까지 배운 모든 것을 알고 실리콘밸리로 떠난다니, 내 꿈이 현실에 가까워졌고, 마침내 몇 년간 나의 노력이 보상받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 미국 비자가 거절되었다. Illustation generated with AI 그렇게 한순간에 3개월간의 노력, 늦은 밤의 작업들, 그리고 열정이 사라졌다.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비자 담당관은 나에게 두 개의 질문만 던졌다. 내 여권을 힐끗 보더니, 내 진술을 뒷받침하는 원본의 서류들은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거절 통지서를 들이밀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미국 비자를 거절당한 친구들을 알고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거절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멍해졌다. 넋이 나갔다. 대사간을 나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곧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은 반쯤은 볼 위로 흘러내렸고, 반쯤은 내 눈 안에 머물러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곧바로 내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더듬거리며 내 상황을 전했다. 부모님은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나는 공공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무너져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고 흐르는 눈물을 삼키려 애썼지만, 숨기려 할수록 눈물은 오히려 더 버겁게 밀려왔다. 나는 대전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기차표를 예매하고 역에서 기다렸다. 기차 안에서, 나는 어떤 아줌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 눈 속의 폭풍을 눈치챈 것인지 그년은 조용히 ‘학생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속삭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그 작은 배려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녀는 내가 쓰고 있던 얇은 가면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대전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나는 통로 쪽에 앉아있었고 신발 끈이 풀려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묶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줌마가 그것을 가리키더니,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내 신발 끝을 묶어 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더 크게 울어야 할지, 뜻밖의 다정함에 감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완전히 부서진 기분이었고 유령처럼 걸었다. 택시 대신 버스를 탔다. 스스로 돈이 없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너무 망가진 기분이 들어서 택시의 편안함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KAIST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는데, 강렬한 오후의 햇빛 아래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한 할머니가 나를 보고는 조용히 자리를 옮겨 우산을 씌워 주셨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영어를 조금 하셨다. “Korea, how much?” 아마 한국에 얼마나 있었냐고 묻고 싶으셨던 것 같다. “Three years.”라고 답하자, “Nara?”라고 물으셨다. “Indo.”라고 하자, 할머니 얼굴이 환해졌다. “아, 카레를 정말 좋아해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짧은 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지만, 따뜻함을 주었다. 그날, 우주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늦게, KAIST 국제협력팀(Global Initiatives Office) 사무실을 찾았다. 학교로 돌아온 뒤에, 출장 보고를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수아님과 진경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부드럽게 물었다. “인터뷰는 어땠어요?” 그 질문이 방아쇠가 되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됐다. 통제할 수 없이, 온몸이 떨리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완전히 취약해지도록 놔두었다. 담당관이 거의 나를 보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았던 일, 몇 초 만에 내 노력이 무시당한 것처럼 느꼈던 감정, 원래도 학점이 별로 좋지 않았었는데 GESS준비에 집중하느라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내 신분을 위험에 빠뜨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부모님을 실망하게 할까,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실망하게 할까 두려웠던 마음마저 모두 털어놓았다. 그들은 내 옆에 앉아 끝까지 들어주었고, 자신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삶의 경험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울어도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들을 믿었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룸메이트가 물었다. “비자 나왔어?” 나는 무심한 척 대답했다. “아니, 거절됐어, 뭐.” 나는 이른 아침의 이동과 감정의 분출이 겹쳐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그냥 조금이라도 자고 싶었다. 침대에 누우니 다시 눈물이 흘렀다. 룸메이트가 듣지 않도록 조용히 울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내 흐느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야, 그냥 울어. 그러면 좀 나아질 거야.” 그 말이면 충분했다. 눈물을 더 이상 막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꼭 안아주었고, 그날 밤늦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나갔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인 마음이 크게 느껴졌다. 그때쯤, 나는 팀원들에게도 비자 상황을 알렸다. 위로와 슬픔, 분노의 메시지가 동시에 쏟아졌다. 나는 팀원들에게 다음날 있을 중간발표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큰 발표도 아닌 중간 점검 발표였지만, 팀의 흐름을 깨거나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팀원들은 내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었다. 다음날, 팀 리더에게 메시지가 왔다. “Aanya, 우리는 네가 발표에 와줬으면 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와줘. 네가 있으면 팀이 더 강해져.” 나는 망설이며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트리거가 될까 두려웠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내가 무너질까봐.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들은 어떤 순간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발표를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어 줄 기회를 내가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갔다. 발표 장소에 들어서자, 주최자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을 시간을 갖고 정리했고, 국내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는 계속해서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팀원들은 나를 꽉 안아주며, “그건 그냥 하나의 불운한 사건일 뿐이야, 하지만 이 팀은 평생 가.”라고, 말해주었다. 발표는 순조롭게 끝났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국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의미 있고 따뜻했다. 사흘 동안 우리는 비지니스 아이디어를 다음과 멘토들로부터 값진 피드백을 받았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따뜻함과 정서적 지지가 없었다면, 내가 과연 참석할 용기를 냈을까?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다른 사람들이 실리콘밸리에 가져갈 짐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강한 FOMO(Fear of missing out)를 느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쓰라림보다는 모종의 부드러운 감사를 느꼈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였다. 그들은 패배의 충격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완충재 같았다. “걱정하지 마, Aanya, 우리가 초콜릿 잔뜩 사다 줄게”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했다. 한 주가 지난 후, 내 친구들은 초콜릿 한 봉지와 스탠퍼드 티셔츠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상징적인 선물이었다. 나는 스탠퍼드를 걸어보지 못했지만, 팀원들은 그 일부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아케이드에도 갔다. 게다가 팀 리더는 내가 아무것도 놓치지 않도록 실리콘밸리에서 들은 모든 강의를 노트로 정리했다. 그런 세심함과 배려, 우정 덕분에, 내가 전생이 무슨 선행을 했기에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비자 거절은 내게 단순한 장애물이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내 자존심과 내 노력, 심지어 정체성에 상처를 남기는 균열이었다. 비자 거절 이후 한동안 나는 내가 이 자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 대신 다른 사람들이 선발되어 떠났고, 그로 인해 다른 참가자들과 심지어 내 팀과도 나는 거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을 수 있었을 무한한 기회들과도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꿈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는데, 그것이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그 찰나의 순간에 증발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세상은 계속 움직이는데, 나만 실망의 가장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기차와 버스 정류장의 아줌마들, GI의 직원들, 룸메이트, 친구들, 팀원들. 그들은 각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주었다. 연민, 따뜻함, 시간. 이 작은 제스처들이 나를 다시 꿰매 주었다. 그들은 해결책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함께 있어 주었다. 실패를 없애주지는 않았다. 대신, 의미를 만들어 주었다. Illustation generated with AI 다시 생각해 보면, 거절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 않았다. 실리콘밸리 여행보다 훨씬 지속 가능한 것을 내게 주었다. 바로 성공이 사라질 때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우리는 성공이나 실패 때문에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결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된다. 사람들은 실패를 개인적 공백, 정체성의 단절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실패는 특별한 침묵을 동반한다. 바쁜 삶의 소음 속에서 중요한 침묵,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더 잘 듣게 해주는 멈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지 성찰하게 하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침묵은 관계의 진짜 색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들은 그 침묵 속에서 사라지고, 어떤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곁에 남아 다가와 준 이들, 당신들이 나의 회복의 이유다. 당신들은 실패와 실망을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었다. 강함이란 눈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플 때조차 계속 나타나는 선택인 것을 일깨워 주었다. 이 글을 읽으며, 실패 속에 혼자라고 느끼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실패는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때로는 인생의 한 페이지가 조용한 구석으로 넘어가며 누가 당신 곁을 걷는지를 드러내는 순간일 뿐이다. 때로는 자존감을 태워 겸손과 취약함, 연결의 공간을 선물하는 불이 되기도 한다. 기억하라. 당신은 잘되지 않은 일들이 아니다. 당신은 오렌지색 편지가 아니다. 당신은 남아 있던 대화들, 나타나 준 사람들, 가장 낮은 순간에 당신을 찾아온 사랑이다. 그것이 진짜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실패의 숨겨진 선물일 것이다. 실패는 한계와 수정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랑을 가르치고, 누군가의 곁에 머무는 힘을 가르치며, 연결과 인간적 접촉의 힘을 가르친다. 점점 더 경쟁적으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낮아지고 취약해지고 울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성공이든 실패든 당신의 모든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관계에 대한 신뢰의 증거다.
원본
2026-03-05
Erisu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2025 KAISTian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 "실패가 분명해지면 사람들은 싸우는 법을 잊는다. 그러나 사랑은 약이고, 희망은 등불이며, 비극의 서막은 환영에 불과하다. 기억을 되짚으며 나는 깨달았다. 죽음에 맞서는 싸움에서도 무기는 중요하며, 그 무기는 상대의 머리를 벨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워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기적을 바란다 ― 하지만 그 이야기를 만드는 신이 공감 하나 없는 존재라 해도, 심장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다 해도, 우리는 마지막 순간을 용감한 미소로 마주할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절대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원본
2026-03-05
○○○ KAIST 새내기과정학부
2025 KAISTian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 누군가는 고등학교 시절의 실패와 대학 합격이 인생에서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앞으로의 긴 인생에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에게는 이 경험이 삶에서 가장 깊은 좌절이었고, 동시에 가장 값진 깨달음이었다. 더 이상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패를 지나오며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고, 앞으로 어떤 실패가 닥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카이스트가 말하는 여섯 가지 KAIST DNA를 모두 존중하며 이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모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준 것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KAISTian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곱번째 DNA라고 생각한다.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