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도 더 미숙했던 때,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애써 얻으러 했었다. 아직 내 감정조차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어찌할 줄 몰랐고, 상대를 살피며 나를 지워갔다. 그땐 사람의 마음에도 실패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이따금씩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힘들어지는 시기가 있다. 내가 힘들었던 시기에 나타나 나에게 새로운 감정과 재미를 주고 힘듦을 잊게 만들어준 그 사람을 나는 쉬이 놓지 못했다. 처음에는 힘든 시간을 함께해줘서 마음이 갔다. 나를 재밌게 해주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며 나에게 눈을 맞췄고, 함께 걷는 길에서는 걸음을 맞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행동들보다 그 사람 자체가 좋아졌다. 나와 같이 있고 싶다고 수줍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불안했고, 한편으로는 그와 그렇게 가까워지는 게 좋았다.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우리 사이를 보며, 당연히 우리의 결말은 긍정적일 거라고 예상했다.
서로 비슷한 점을 하나씩 늘어놓으며 이제야 만난 우리가 같은 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끊기지 않는 대화가 재밌었고, 서로의 일상을 간질간질한 말로 나누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잠에서 깨어 나갈 채비를 할 때도,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동기들과 캠퍼스를 거닐 때도, 나는 그와 나눌 재미난 에피소드를 찾으려 노력했다. 내 일상은 그와 나눌 이야기로 채워져 갔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상대를 위한 배려와 희생이 나를 지키고 상대도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일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그에게 되물었을 때, 그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보니 사랑인 건가 싶다고 했다. 이런 대화거리가 사라질 때쯤, 우리의 관계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같은 과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둘이 함께 걸어가던 육교 위에서 그는 술기운을 빌려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물론 너무 좋았다. 그러나 맨정신에 다시 확인받고 싶었던 나는 “그런 말은 맨정신에 해줘.”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소위 말하는 썸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 켠의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답답했던 나는 우리 사이를 결론 짓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나와 사귀고 싶진 않지만 계속 이런 사이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참 이기적인 말이었다. 이럴 거면 시작하지도 말지. 아니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건가? 나는 이 애매한 관계를 끝내던가 사귀던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을 생각했기에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사귄 적도 없는데 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울며 말하는 나에게 그는 “그럼 안 헤어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이미 내 마음에 자리잡은 그를 다시 내보내는 게 너무 싫었다. 사귀지 않을 거면 끊어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애매한 사이로나마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다 이성이 앞서갔을 땐 그를 밀어내려고 그만하자 말했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감정이 더 커져 원래대로 돌아오곤 했다. 어찌 보면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우리는 이 불안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익숙함과 좋아하는 마음은 커지는데,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정의 내릴 수 없고, 그는 점점 이 관계에 흥미를 잃어가는 게 느껴졌다. 가볍게 생각하자, 기대하지 말자, 하면서도 나와 같은 크기의 마음을 자꾸만 그에게 기대했고, 그게 아니면 혼자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나를 점점 작게 만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너무 따뜻하고, 어느 날은 너무 차가운 그의 말과 행동은 더운 물을 붓고 거기에 다시 찬 얼음을 쏟아붓듯이 미지근함을 유지했다. 그는“나는 너를 제일 걱정하고 신경 써.”라며 더운 물을 부었다가, “너랑 이러는 거 이제 재미없어!”라며 찬 얼음을 끼얹었다. 그의 온도에 맞추느라 내 온도는 계속 오락가락했다. 그럼에도 그의 미지근한 온도가 나에게 닿으면 차가우려 했던 내 마음이 어느새 뜨거워졌다. 그 온도가 올라갈수록 처음엔 녹아내리던 내 마음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같았고,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내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했다. 그가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며 다가오면 그날의 내 기분은 맑았고, 그가 나에게 차갑게 대하며 멀어지면 그날의 내 기분은 흐렸다. 이런 내 모습이 정말 싫었지만, 내 마음은 또 그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내 하루는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나는 항상 그를 생각했다. 그렇게나마 그와 연결된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또 다시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서로가 일상에 너무 스며들어 있었다. 서로가 없는 일상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관성처럼 서로를 찾았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그냥 만나서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냈는지 얘기하며 맥주 한잔하는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누구 하나가 정신이 들면, 이제는 진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로 “그만하자.”, “아니 다시 잘 지내보자.”는 말을 던지고 받으며 또 시간이 흘러갔다. 언젠가 이 마음이 닳고 닳아서 내가 그를 놓을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이때쯤 나는 ‘계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에게 그는 내가 갖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나는 남 주긴 아깝지만, 내가 갖기는 싫은 계륵이었던 것 같다. 이 관계는 결국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부족했고, 우정이라기엔 너무 과했다. 그래서 이 관계는 실패였다.
그를 통해 내 감정의 밑바닥도 보았고, 내 자존심의 끝도 보았다. 내가 그의 마음 모두를 얻으려 할수록 그는 나와 멀어지고 싶어 했다. 이에 지쳐 나도 이 악물고 그를 멀리 하면 그는 어느새 다시 내게 다가왔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한 번 속는 척하며 그에게 돌아갔다. 그 정신없는 도파민에 파묻힌 채 지냈던 시간을 모두 늘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동안 나는 그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빠는 이제 나 싫어?”라고 물었다. 그는 “싫은 거 60%, 좋은 거 40%야.”라고 답했다. 싫은 마음이 60%라는 말이 내 마음을 찔렀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마음이 40%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싫은 마음이 60%나 되는데 왜 맨날 같이 있어?”라고 물으니, “그게 내 일상이 된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그의 일상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이런 말을 듣고도 나를 잃는 것보다 그와 멀어지는 게 더 싫었다.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했다. 그가 어떤 말을 싫어할지, 어떤 행동을 싫어할지에 대한 질문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점점 작아지는 나를 보면서도, 나는 그걸 당연시했다. 다른 곳을 향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느 날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입밖으로 나올 것도 같았지만, 꾹 삼키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별 것 아닌 척했다. 혼자 이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안에는 답답함과 상처가 늘어가고 원래의 해맑던 모습을 잃어 갔다. 그의 마음을 넘겨짚을수록 나는 더 불안해졌고, 그에게 더 집착했다. 그는 그걸 못 견뎠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사랑의 실패라기 보다는 나를 지키는 것에 대한 실패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나를 잃고서야 이 관계는 실패였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그 긴 시간 내내 불안하고 상처받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함께 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편안하진 않았지만 편했고, 하루 끝에 함께 술 한잔 나누며 근심을 털어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꽤나 큰 안정이었다. 서로 아껴주지 못하고 날이 서있던 말과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버텨왔다. 나는 그 앞에서 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를 잃는 게 무서웠던 걸까, 그를 사랑했던 내 모습을 잃는 게 무서웠던 걸까. 나를 버리면서까지 지키려던 관계를 상대가 먼저 놓았을 때, 짧지 않은 시간이 나에게 이별 아닌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나의 일상이었다.
그의 집 앞에 찾아가 있는 힘껏 붙잡아도 봤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단호했다. 나는 그 실패를 꽤 오랫동안 부정하고 싶었다. 보통의 것과는 다른 그런 관계를 믿은 내 순진함이 미웠다. 그를 좋아했던 마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도 나랑 비슷한 크기의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그가 나에게 밝게 웃어주고 나도 그 앞에서 해맑기만 했던 모습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후회. 그 중에서도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장 컸다. 이런 마음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지만 그는 나와의 대화 자체를 피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카톡을 보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너무 과해.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야?”라고 물었다. 그의 진심 같았던 표현을 굳게 믿고 보여준 내 진심이 부정당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내 일상은 그였는데, 갑자기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는 게 싫었다. 그런데 그는 나와 멀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끝에 지친 내가 그를 마침내 놓았을 때, 그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그와 함께한 시간동안 나를 아껴주지 못했다는 자각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실패해도 나 자신까지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그가 나에게 오기 전에 나는 어떻게 살았었지? 이전의 내 일상이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내가 누구인지 정의 내려야 했다. 어리숙했던 그 시기에 모든 걸 의지했고, 하루 끝에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버텼기에 그를 놓는 건 이제 내가 진짜로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서로 좋아서 시작된 관계였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너무 진심을 줘 버렸나 하는 자책도 해봤다. 처음엔 자기가 좋다고 시작했으면서 내 마음이 더 커져 버리니 멀어진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이때 나는 무작정 바쁘게 지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채워가며 조금씩 다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 관계의 실패를 통해 혼자인 나도 온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랑 없이도 나는 나였고, 사랑 안에서도 그랬어야 했다. 온전한 사랑은 오히려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 사랑에서는 나를 잃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내가 막상 체념하니, 그도 약간은 아쉬웠나 보다. 그러나 그건 나라서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갔다는 공허함 때문이었을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반가운 말에 속지 않기로 했다. 그가 영영 떠나버리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이어질 날이 오겠지. 이번 타이밍은 서로에게 영 아니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 그가 너무 빨리 들어왔다. 너무 좋아했지만 서툴렀기에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들은 후회로 남았다. 지금 그를 만났다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은 더 성숙한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그와의 그 애매한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서로의 밑바닥을 애써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를 떠난 것인지 나를 놓아준 것인지, 내가 그를 놓아준 것인지 그를 떠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완전히 떠나며 힘들어하는 나에게, 시간이 지나면 다 무뎌질 거라고 말했었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말했다.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의 모서리는 조금씩 닳아 무뎌지고, 어느새 그 자리를 웃음이 채우고 있었다. 그와의 기억은 그대로였지만, 그와의 추억은 미화된 채로 그 시절에 남아있었다. 떠올리면 가슴 아팠던 시절을 지나, 떠올려도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날이 왔다. 가끔은 그의 옆에서 밝게 웃던 내 모습이 그립기도 하지만, 나를 무엇보다도 힘들게 했고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던 때로 역주행하지 않기로 했다.
‘멀어진 우리 거리만큼 내 삶과 더 가까워져서’라는 노래 가사가 맴돌았다. 그 사랑의 실패는 나를 무너뜨렸지만, 그 위에 다시 나를 일으켰다. 이 시기를 보내는 동안 나는 또 한 걸음 성장했다. 관계의 실패가 언제나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다. 적어도 사랑을 다 쏟아부은 그 시기의 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고요해졌을 무렵, 새로운 사람이 다가왔다. 그 사람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조용히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또 상처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나는 사랑을 핑계로 나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 나는 서로의 온도를 가늠하고, 온도가 맞는 사람과 찬찬히 어우러지길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치를 보며 내 마음을 검열하지 않아도 됐다. 내 속도를 존중해주는 사람과 사소한 일상에도 마음껏 웃으며 나를 지킨 채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사랑 역시 조심스럽게 끝을 맺었지만, 내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사람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지 나는 나 자신을 지켜내어 온전한 사랑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